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1部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1부

-22世. 號:河西. 諱:인후(麟厚). 시호:문정(文正)

*1510년(조선 중종5년)에 출생.1560(명종15년)년에 더 없는 영광과 더 없는 의분과 더없는 생각으로 가득한 인생을 51세로 서거 하셨다.
字는 厚之,號는 河西,시호는 文正,慕齋 金安國을 마음에 두고 따른 성리학자이다.
이씨 왕조 전기의 후반(중종.인종.명종시대)에,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소재 노수신.고봉 기대승선생 들 세 분의 이름난 유학자가 계셨다.그런데 이 세 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 곧 하서선생이시다
우리나라의 많은 인물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이 겸하여 탁월한이는 그다지 찿아볼수가 없다.
이 세 가지중 어느 한 가지나,기껏해서 두가지 면에 우수한 재분과 빛나는 성과를 나타낸 분은 간혹 있었지만, 세 면에 걸쳐서 모두 심오한 조예를 가지고 고메한 학론을 전개 시킨 분은 오직 하서 선생을 추숭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이 당대의 정평 이었다.이 사실을 조금 후배인 우암 송시열 선생도 극구 논증한 기록이 있다.

*5세에 千子文(주홍사;중국 양나라 사람으로 무제때 천자문을 지었음)을 通達하시어 詩를 짓고 8세에 전라관찰사 (조원기:중종때의 相臣으로 趙 光祖의 삼촌) 와 시 문답을 하시는등 神童의 명성을 얻으셨습니다.

*10세
에(중종14년) 慕齋 金安國 선생을 찿아가 小學을 배우시다
일찍이 모재가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시 선생의 명성을 듣고 몸소 찿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긴 일이 있다. 그래서 선생이 모재를 찿아뵙고 주자의 소학 배우기를 간청하여 강론 토의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모재가 거듭거듭 칭찬하여 마지 않으며 "이는 나의 어린 벗이니 참으로 三代(옛날 중국의 夏나라,殷나라,周나라)에나 있을 어진 인물이다"라고 감탄 하셨다.
그런데,이해 12월에 서울 에서는 남곤,심정,홍 경주들이 趙光祖,金淨,金湜들 젊은 선비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낸 끔찍한 己卯 士禍가 일어 났다.

*14세에(1523년 癸未) 군수 尹任衡의 따님이신 여흥尹氏에게 장가 드시고 그 다음 해에 아드님 從龍을 낳으시다.

*18세(1527년 정해)때 신재 최공을 찿아가 학문을 강론하시다.
崔公의 이름은 山斗(중종때의 文官 號는 新齋 草界崔氏의 始祖)이니 己卯士禍로 東福에서 귀양살이(1533년에 풀림)를 하고 있었는데,학문이 깊기로 이름나 있었다.
그때 선생은 스무살도 않 되었는데 사서 오경과 수많은 학자들이 쓴 역사책을 익히어 깊이 꿰뚤지 않는것이 없어,그 가장 중요한 줄거리와 뜻을 깨달아,정호(程顥).정이(程이)(北宋의 學者 兄弟).주희(朱熹:성리학을 대성한 南宋의 大 儒學者.號는 회암, 시호는 文公, 朱子라 불림)가 주장한 性理學(理,氣,心,情,慾의 상호 관계을 연구하는 학문)을 굳게 지켜 어긋남 이 없으며,천문지리 와 모든 기예에 이르기까지,모든 학설에 정통하셔서 막힌데라곤 조금도 없으시면서도,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기시고 더욱 힘써 스승을 삼을 만한 벗을 찿던중 崔山斗의 명성을 듣고 찿아가 학문을 연구하니,崔公이 매우 탄복하여 매양"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고 선생의 분명한 태도와 맑고 깨끗한 마음을 칭찬 하였다.


*19세(1528년 무자)때 성균관에 가시다.
이 해에 선생이 서울에 가시니 그때 용재 李 荇(중종때의 宰相 號:容齋)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고, 칠석날 수험생들이 성균관에 모여 시험을 쳤는데, 선생이 일등으로 합격하여 그 글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네리니, 대제학인 용재가 선생의 그 글장이 혹시 남이 지어준 것이나 아닌가하고 퍽 의심하여,거처를 성균관 근처에 제한해 놓고 ,일곱가지 제목으로 시험해보니,선생이 그자리에서 답안을 척척써서 시험관에게 올리되,글이 잘짜여 모자람이 하나도 없어서,용재가 놀라 기이하게 여겼다.그중 염부와 영허부라는 두 글장은 하서 본집에 함께 실려 있다.

*22세(1531년 신묘)進士試驗에 합격 성균관에 출입하며서 退溪 李滉 先生(조선 중기의 유학자.호는 퇴계.주자의 학설을 주로한 理氣 二元論을 주장함)과 학문을 연구 하시다.
성균관의 進士(소과 첫 시험에 합격한 사람)를 뽑는 시험에 합격 하시었다.그 다음 해인1532년(임진)에는 할아버지 訓導(전의감,관상감,사역원및500호 이상의 큰고을의 교육을 맡은 종 9품 벼슬)공이 돌아가셨다.
司馬試(生員과 進士과의 자격시험)에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退溪와 친하게 사귀며 학문을 강론하고 이후 퇴계의 推重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기묘 사화를 겪고난 14년 뒤라,선비들의 기가 죽어서 도학에 관해서는 모두들 쉬쉬하고,옳은말을 하지 못할 때인데,선생이 퇴계를 만나서 둘이 서로 마음이 꽉 들어 맞아 학문을 강구하여 그칠 줄을 모르고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수양하기 한이 없다가 ,얼마아니되어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니 선생이 시를 지어 주어 주며 떠나 보냈는데,그시에"공자(퇴계를 가르킴)는 영남의 수재로 李白(당나라 때의 시인.字는 太白.號는 靑蓮),두보의 문장과 왕희지,조 맹부(元나라 초기의 시문,서화가. 자:子昻)의 필치를 지녔도다"라는 뜻의 귀절이 있었다.

*26세(1535년 을미) 잠시 고향에
4월에 의정부에 불이나서 다 타버린일이 있었던 해인데,선생은 잠시 쉴 겸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가,다음해(27세때) 여름에 다시 성균관에 가셔서 공부를 하시던중,신재 최 산 두공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선생이 최공과 정의가 두터워 그의 소렴(小殮:시체를 옷과 이블로 쌈)때 ,상복을 입고 수질(首질:상복을 입을때 머리에 두르는 테두리.짚에 삼껍질을 감은것)을 둘렀으며,그제삿날에는 반듯이 제관이 되어 사흘동안 재계(齋戒:몸과 마음을 깨끗이하고 부정한일을 멀리하는 일)하셨다.

*31세(1540년 경자) 별시 문과에 합격
4년전 28살때에 아드님 從虎를 낳으시고 다음해 초여름 4월에 글을 지어 작고한 최 신재공의 제사를 지내셨는데 그제문은 문집에 실려있다.
경자년 겨울 시월에 베풀어진 임시 과거 문과에 합격하여,벼슬차례에 따라 承文院(외교문서를 맡은 관청) 副正字(正字의 다음 벼슬.종 9품)가 되셨다.

*32세(1541년 신축) 사가독서 4월 초여름에 임금이 휴가를 주어독서당에서 문학을 닦게 하셨다.
호당 수계록:선생이 독서당 즉 호당에서 함께 뽑힌 동료 열 두사람과 계를 짜셨는데,그때의 호당 수계록(湖堂修계錄)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재 (艮齋) 최 연(崔演) 퇴계(退溪) 이황(李滉)
십성당(十省堂) 엄 흔(嚴昕)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추파(秋波) 송기수(宋麒壽) 우암(寓菴) 김수(金樹)
송재(宋齋) 나세찬(羅世纘) 상덕재(尙德齋) 정 유길(鄭惟吉)
국간(菊磵) 윤 현(尹鉉) 급고재(汲古齋) 이홍남(李洪男)
죽계(竹溪) 임 설(任說)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초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正字:정 9품 벼슬)가 되셨는데 다음해 임인년에는 초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著作:정8품벼슬)으로 승진하셨다.

*34세(1543년 계묘)봄에 모재 김안국 선생이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들으시다.
선생이 모재 선생과 맺은 정의가 매우 두터워서 상제가 되어 수질을 두르고,제삿날에는 제주가 되어사흘동안 마음과 몸을 깨끗이하고 ,부정한일을 멀리 하였으며,그의 죽음을 슬퍼하는글(挽詞)가 있으니 문집에 실려 있다.

초여름 4월에 홍문관 博士(박사:교학을 맡아보는 벼슬.지금의교수.정7품벼슬) 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조선시대 왕세자에게 경사를 강론하고,옳은 도리로서 잘못을 고치도록 타이르는일을 맡은 관청) 설서(說書:정7품벼슬)를 맡으시고 왕세자가 손수 손수 먹으로 그려서 보내주신 대나무 그림을 받으시다.그때,세자("인종대왕"이 될분)가 왕세자로서의 덕을 쌓고 계시니,중종대왕께서 그 세자를 도와서 인도하는 임무를 오로지 선생에게만 맡기셨고,세자도 선생의 학문과 도덕이 넓고 옳음을 잘 아셔서 성심껏 공경하고 예로서 대하여,불러 마주앉아 의논할때마다 정중하고 정성스러우셨다.선생도,세자가 임금이 되기 전에 닦으시는 덕이 천고에 뛰어나서,후일에 임금이 되어 요,순처럼 선정을 베풀기를 바랄수 있도록 지성으로 길을 열어 드리니 신임이 날로 두터워,선생의 거처까지 세자가 오셔서, 조용한 가운데 장시간 어려운 문제를 묻기도 하셨다.
세자가 본디 제주가 뛰어 나시되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며서도 오직 선생에게만 손수 먹으로 대나무 그림 한 폭을 그려 주시며서 간절한 마음으로 선생에게"그 화촉에 맞춰 시를 지으라" 하시니
선생이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뿌리 가지 마디 잎이 정밀도 하여 根枝節葉盡精微
단단히 맺어진 마음 그 안에 있네 石友精神在範圍
성신의 조화 같음 비로소 알아 始覺성神우造化
한 무리 하늘과 땅 어길 수 없네. 一團天地不能違

유월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종6품 벼슬)으로 승진하시고,나라일에 관하여 임금께 글을 올리면서 기묘사화로 희생당한 여러 선비들의 억울함을 극렬하게 논란하시다.그때 세자궁에 불이 나서 선생이 임금께 글을 오리게되어 ,분개한 마음으로"수양하고 반성하는길"을 진술했는데,대략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은 어진 인재를 가까이 하며,선비의 풍습을 바룸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옵니다.어진 인재을 가까이 하며,임금을 도와 백성을 감화시킬수 있을 것이오,선비의 풍습을바루면 사람이 지킬 떳떳한 도리가 밝혀져,풍속을 두터이 할 수 있을 것 이옵니다.
지난 번의 기묘사화 같은 것은,전국 선비 사회에서 그 무고한 죄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들이 지금까지 본심을 털어 놓지 못하고 있사옵니다.그러므로,죄가 아님을 밝히고 ,위로는 전하께옵서 의심 하옵시는 모든 생각을 푸옵시고,아래로는 억울한 여러 신하들이 저승에서나마 원한을 씻게 하옵심이 가한줄로 아옵니다.어떤 사람이 바른 말을 하여 바로 잡으려 하오면,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배척하오니,선비들의 풍습이 바루어지지 아니하옴이 이 때문이옵나이다.바라옵건데,전하께 옵서는 현명하옵신 단안을 내려 허심 탄회하게 정사 숙고 하여 반성 하옵시고,사실을 두루 살피사 정확하게 알아 보옵시되,학문을 닦는 데에 있어서 미진한한 곳은 낱낱이 찿아 밝혀 정성껏 도리를 살피옵나니,재앙의 근원을 깊이 헤아리사 스스로 통절히 힐책하옵실 것이며, 날로 두려운 마음으로 수양하사 근본부터 맑히옵시고, 겉과 속이 충실하여 추호의 사심도 없도록 하옵셔,모두가 옳고 그름의 뒤석임을 두렵게 알도록 하사,시비를 잘 가려서 볼품 없이된 선비의 풍습을 일으키옵시고 ,해이해진 사회기강을 진작 하옵셔,임금의 교화가 시들어 가고,사회 풍습이 문란해지는 따위의 근심이 없도록 하옵소서."

그 때는 기묘사화가 있은지 24년이 지났건만는,전국 선비들이 아직도 말하기조차 꺼리고싫어하며,두려워서 잔뜩 위축되어 감히 그 때 일 을 입 밖에 내고자 하지 아니한 때인데도 불구하고,선생이 홀로 분개하여 이 상소와 같이 의견을 털어 놓으시니,그 말이 아주 바르고 마땅한지라,중종이 비록 즉석에서 허락 하지는 않았으나, 그로부터 여러 신하의 원한을 깊이 깨달아 자주 뉘우치는 빛을 보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