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2部

*34세(1543년 계묘)에 한가을 8월에 휴가를 얻어 어버이 뵙는다고 귀향하시다.
선생이 어려서 부터 세상을 다스려 보려는 마음이있어 첫 벼슬할 때에 김안로(金安老:조선 중종때의 權臣으로 영의정 까지 지냄)를 멀리 하셨고 김 문경(文敬:김안국의시호)과 이 문원(文元:李彦迪의시호:조선 중종때의 賢臣으로 성리학자이며 인종때는 우정부 우찬성을 지냄)같은 당세의 문장가요성리학에 조예가 깊은 분들에게 조금씩 따라 붇는 사람들이 있어 ,어지러운 세상이 바로잡아지려는 낌세가 보이기도 하므로,세태가 흡사 왕일초(汪一初명나라 시인 호:陽復)가 조금씩 세력을 펴 나아가듯 하는것 같은점이 있기는 했으나 임금의 친척들이 서로 마음이 안맞아 티격태격 하는지라 세상일이 마음이 않 놓이고 근심이 되어,선생이 항상 홀로 깊이 생각하셔 세상 실정을 밣히 꿰뚤어 보시고 ,마침내 어버이의 나이가 많으셔서 고향으로 돌아가 돌보아 드려야겠다고 간절히 빌어 고향으로 떠나시게 되었는데,이때 퇴계 이 황선생이 시를 지어 보내왔다.

겨울 섣달에 옥과 현감으로 임명되고, 그 직함은 그대로 가지고,현감만 가지고는 격이 낮으니까 격을 높이기 위하여춘추(春秋:당세의 정치에 관한 기록을 맡는 벼슬)라는 벼슬 이름 까지 붙이게 되셨다.

*36세(1545년 을사)
지난해 동짓달에 중종 대왕이 승하 하셨기 때문에,이해 초 여름 4월에 인종께서 제술관(製술官:숭문원의벼슬.왕실의 의식에 관한 글을 지어 바치는 임시벼슬)으로 부르셔서 가셨다가,근무처인 지방 관청(옥과현청)으로 돌아 오시다.중국 사신 張 承憲이 와서중종 대왕의 초상을 조문하니,정부에서 선생으로 제술관을 삼고자 임금께 아뢰어 ,그결정에 따라 마침내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제술관으로 나아가 큰일을 치르신 것이다.
이때 인종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니,조정과민간에서나라가 태평할것을 기대하여,모두 선생이서울에 머물러서 임금께 경서를 강론하고,보살펴 드렸으면 하고 바랐으나,선생은 벌써부터 세상 돌아가는 기미를 알아 차려서,아무 생각이 없어 머무르고자 하지 않으실새,마침내 인종 대왕께서때로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시고 편하게 지낼수가 없으셔서,선생이 한자리에 나아가 약쓰실것을 의논하려 하면내시원(內侍院:조선시대 내시들이 근무 하는곳)사람들이 "맡은 직책이 아니라"고 가로 막곤 하므로,그만 어버이가 병이 위중 하다는 핑계로 굳이 청하여 임지로 돌아 오신것이다.

초가을 7월에 인종 대왕께서 승하 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몸이 성하지 않다고 벼슬을 그만 두시고 집으로 돌아와 들어 앉으시다.선생이 인종 승하 소식을 들으시고,몹시 슬퍼서 가슴을 치고울부짖으시며,살고싶은 마음이 없는것 같이 가슴 아파 못견디시며,숨이 끊어졌다 겨우되 살아났다 하셔,마침내 병들어 근무를 할수 없다고집으로 돌아 오셔서,세상일을 다 물리쳐 버리고,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기로 굳게 다짐 하셨다.
이무렵에 지은듯한 백구가가 하서 전집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갈꽃 핀곳에 저녁 놀 비껴 띠고 蘆花發處落霞橫帶
삼삼 오오 섞여 노는 저 백구야 三三五五雜遊之彼白鷗
우리도 강호 구맹을 찿아 볼까 하노라. 我輩江湖舊盟將굴
*江湖舊盟:자연속의 옛날 약속


*37세(1546년 병오) 明宗 첫해
늦여름 유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효도에 관한 공자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을 주 희가 개편한책)의 발문(跋文:책끝에본문의 대강을 간단하게 적은 글)을 지으시다.
선생이 옥과 현감으로 계실때,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조선시대 중기의 문관)이 서울에서 고향으로 돌아 가며서,옥과를 지나가는길에 문공 주희의 "효경 간오"라는책을 가지고 가다가 보여 주므로,선생이 매우 기뻐 하시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이제 그 책 끝에다가 발문을 써서 그뜻을 자세히 밝혀 찿아오는 제자들에게 일러 주셨다.그발문은 문집에 실려 있다.

선생이집에 돌아오신 때 부터, 오로지 학문을 강론 하시는 데에만 힘쓰시니,학도가 소문을 듣고 모여드는지라,그들을 다정 스럽게 타일러 가르치시되,반듯이 먼저 "소학"을 읽고난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시어,한결 같이 문공 주 희의 학문을 본밭게 하시며,두아드님을 가르치시는데에도 ,역시 "소학"을 십년토록 이나 익히고 다른책은 거들떠 보지도 못하게 하셨다.

인종이 그리워 시를 짓다.
을사년에 인종께서 승하하신 이후,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가 되면,책도 덮어 두시고 사람도 만나지 아니하시고, 근심에 가득차서 즐거워 하지 않으시고 문밖 출입도 하지 않으시다가,7월 초하루 효릉(인종)(孝陵:서삼릉의 하나 조선 12대 인종 대왕과 인성왕후의 능)젯날에는 제수를 장만하여 가지고 마을 남쪽산에 등러가,마시며 울며 하루종일 목을 놓아 통곡하시다가 저녁에야 돌아 오시기를 평생 한결 같이 하셔,한번도 거르는일이 없으셨다.또, 느낀바를 시로 지어 나타 내셨는데 다음과 같다.

우리 님 서른 한 살 *참고
내 나이 서른 여섯, 1545년 을사년에 인종31살,선생36살 때,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기껍다 말았어라 승하하고 뒤를 이어 명종이 등극하자,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문정
활 떠난 화살일레, 왕후를 업고 인종의 외숙 윤임 일파를 몰아낸 사화가 있었는데,
내 마음 변할손가 인종은 중종의 둘째부인 장경왕후의 아들이며,명종은 중종의 셋째
세상 일 동류수라 부인 문정 왕후의 아들로서,인종이 배다른 형이다.
한창 때 헤어져서
눈 어둬 머리 희끗,
미련한 몇 봄가을
아직도 죽지 못해,
잣배는 물 가운데
남산엔 고비 없어,
부럽다 태임.태사
괴로운 도꼬마리.


_____ 벼슬 사양___________

*38세(1547년 정미)
봄에 성균관의 전적(典籍:성균관 도서를 맡은벼슬 정6품)에 임명 되었으나취임하지 않으셨고 가을에 공조정랑(工曺正郞:상공부 정5품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으셨다.
그무렵에 시를지어서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그시에는 다음과 같은것도 있다.

하늘 아래 두 사람 공자와 주자일레
마음을 가다듬어 옆길일랑 엿지 마라
이토록 이즈러진 몸 어루만져 주누나

선생이 글에 뜻을 두신 이후로, 성인들이 도덕의 표준을 세웠다가 시들해져,공자가 없으면 성인들의 도를 전하지 못하고, 공자 가신 후에 賢人들이 그 뒤를 이었으나 흐지브지 되어,주자가 없은즉 공자의 도가 어두우니,공자와주자가 두분이서 이루어 놓으신 훌륭한 공적이 온 세상에 높이 빛남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현들이 이를 숭상하지 아니하메,그것을 말끗마다 글귀마다에 나타내시어 후배들을 이끄시니,선생의 그 대강의 뜻을 이 시에서 엿 볼수 있으며,시를 지어 제자 李至男에게 보내신 것이다.

이해에, 문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들이, 과거에 윤씨 일파의 비위를 거스른 일로,정미사화(정미사화=벽서의 옥)에 관련되어 억울하게 죽자,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으셨다.

엊그제 벤 나무 백척 장송 아니런가
적은덧 두엇던들 동량재 되리러니
이 뒤에 명당 기 울면 어느 나무 받치리.

*39세때(1548년 무진)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둔전리 점암 마을에서 사시다(지금은 여기에 유허비와 훈몽재(訓蒙齋:하서 선생이 제자를 기른 서당.여기서 정철,조희문,양자징,기효간,변성온 들이 났다) 터가 있음)
초당을 지어 어린 아이들과 초학자들에게 글을 가르치시고, 날마다 여러 선비들과학문을 강론하고 쉬시면서,모든것 훨훨 떨어 버리고,띠끌 세상을 벗어나시려는 생각 뿐이셨다.
시월에 퇴계 이 황이 풍기 군수가 되었다.

*.40세때(1549년 기유)
봄 2월에 "대학 강의"발문을 지으시다.
선생이 주자 대전중에서 대학의 뜻 풀이를 보시고, 그말의 뜻이 명백하고 조리가 환하게 밝으니, 임금 앞에 나아가 강론하여도 임금이 감동하여 분발할 만 하다고 생각 하시고,그것을 유별나게 드러내어 대학강의 끝에 발문을 붙이셨다.그발문은 문집에 실려 있다.

여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가을에 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으셨다.

초겨울 시월에 아버님 참봉공이 돌아가시다.
선생이 아버님 돌아 가심이 너무 슬프셔 몸이 야윌데로 야위시고,고달프셔서 몸을 가누기가 힘드실 지경이었으나,모든장례 절차를 빠짐 없이 몸소 돌보셔 섣달에 집의 서쪽 원당동에 장사 지내셨다.
그리고서,3년동안 돌아가신 아버님 참봉공의 산소옆에 묘막을 짓고 거처하시는데,그방에"湛齎(담재)" 라고 쓴 자그마한 액자를 걸어 놓으시고 선생의 아호를 삼으시니,언재부터 그 雅號를 쓰셨는지 모두들 잘 몰랐다.

*.42살때(1551년 신해)
어머님 조씨부인이 돌아가시다.
슬프신 가운데,모든 예절과 의식을 다하고 있는 아버님 거상중에 어머님 마져 돌아가시니,9월에 아버님 참봉공 무덤의 왼쪽에 나란히 장사 자내 셨다.

*.44살때(1553년 계축)
7월에 대왕대비(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거두고,명종이 정치를 넘겨 받고나서,선생이 늦가을 9월에 홍문관 校理(홍문관의 정 5품벼슬)에 임명되시어, 부임하러 서울로 가시다가, 도중에 병이 났다고 임금께 글을 올리고 되돌아 오셨다.
임금(명종)께서 그 글을 받아 보시고,"편지 내용은 지극히 간절 하나, 그러나 병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임금을 섬기는 의리도 또한 소중한 것이니, 몸조섭 잘하고 이치를 잘 분별하여 올라오라"고 하교 하셨다.
선생이 또 병이 위중하여 견디기 어려운 실정을 간절하게 아뢰고, 끝내 임금의 명령을 받들지 않으셨다.임금께 올린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45살때(1554년 갑인)
늣가을 구월에 성균관 직강(直講: 성균관 4명중 정5품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셨다.
임금께서 선생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잊히지 않아,"병이 있다하고 오지 아니하니,내 빈 마음 한없이 서운 하도다."하셨다.
초겨울 시월에 먹을거리를 보내 주신다는 지시를 받고글을 올려 사양 하시다.그때, 임금께서 본도 (전라도)지사에게 특명을 내리어 먹을거리(지금의 연금 같은것)을 보내라고 한것을,선생이 글을 올려 사양하셨는데,"마음을 편안히 하고,몸 조심 잘하여,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나의 뜻을 받들라."하시는 임금의 분부를 받으셨다. 임금께 올린글은 문집에 실려 있다.
임금은 그렇더라도,선생은 아무 뜻이 없어 모든것을 버리고 체념하여,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선생의 작품이라고 전해지는 자연가는 다음과 같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저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난 몸이라 늙기도 절로절로

靑山 自然自然 綠水 自然自然
山自然 水自然 山水間 我亦自然
사이哉 自然生來 人生將 自然自然老

-----------오로지 학문만-------

47살때(1556년 병진)
화담 *서경덕의 "주역을 읽고"에 붙여 시를 지으시다.<周易:중국 상고시대 복희씨가 그린 괘에대하여 周나라 文王이 통털어 설명하고,그의 아들 周公(주공:무왕의 동생)이 그 六爻앞서 에 대하여 자세히 풀이하고,공자가 여기에 심오한 원리를 붙인것)>
앞서 서화담이 심학(心學:마음의 본체를 확인하여 몸을 닦는학문.陸象山,王 陽明이제창한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여 으뜸을 이루엇는데, 주역을 읽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팔괘라 그 속에는 만물 근본 지녀 있어
세상에 작용하여 온갖 이치 전하도다.
복희씨 지은 팔괘 참된 형상 본 을 뜨고
주나라 역경에서 하늘 이치 풀었도다.
만물을 추구하여 모든 조화 알게 되고
우주의 근원 찿아 오묘한 것 깨치도다.
글에서 말 다 못 함 말 밖에 뜻 있기 때문
공자님 아니라도 가죽 책끈 끊기도다.
_위편삼절(韋編三絶):공자가 주역을 애독하여 가죽으로 맨 책끈이세번이나 끊어 졌다하여 "위편삼절" 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이 시를 선생이 보시고,"성인의 말씀은 곧 하늘과 땅의 도리이니,보탤것이 없다"고 하시고서,그시의 운을 따서다음과 같은 시를 지으시다.

우주의 온갖 것이 *무극으로 근본 삼아
큰 덕화 고루고루 *품물 함께 정하도다.
복희씨 지응 팔괘 차차 변해 밝아지고
주역은 사람 하는증험하여 밝히 도다.
글 공부 다 하면 묘한 이치 알게 되고
깊 도록 겪고 나면 다시 하늘 깨닫도다.
본뜨고 풀이한 말 품으신 뜻 다하여서
일찍이 성인들의 끊긴 책끈 생각도다.

그리고,또 시 한 수

사람들 하는 공부 앞뒤 차례 있을지니
*증자의 가르침을 뉘라 먼저 전할 건가
참으로 안다는 건 실지 행동 그 아니랴
배우기 시작하면 하늘까지 닿아야지
성인들 하신 말씀 밝고 밝지 아니한가
마음껏 배운 이들 깊은 경지 깨달았네
본원을 찿는 길은 깊이는 데 있다던데
싫다면 책읽기를 그만둠과 같지 않나.

*면학 기풍 고취
서화담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차근 차근 공부하기를 우습게 여겨,외기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쉽게만 깨달으려 하므로, 선생이 염려 하시고 앞 시의 운에 맞춰서 시를 지어 그 풍토를 바로 잡으려한 것이다.
----*徐敬德:조선시대 초기의 성리학자.도학자.號:花潭
----*無極:우주에 앞서 존재한 원시의 근본을 이루는것.
----*品物:형체를 갖춘 온갖 물건
----*曾子:노나라 사상가.공자의 제자.효도를 역설 하였다.

*48세때(1557년 정사)
"주역 관상편"과 "서명 사천도"를 지으시다.
선생이 *태극도설과*서명 들의 글을 오랜 세월에 완전히 풀어 익히시되,읽기를 천 번이나 하기에 이르셔서,그림을 그리고 글로 써서 배우는 이들에게 보이 시기를 "*주 돈이의 태극 도설은 도리가 아주 자세하여 글이 간결 하면서 뜻이 풍부하고, *장 재의 글은 규모가 넓고 틔었으면서 뜨지도 빠지지도 않으니,만일에 천품이 학문에 밝으면 먼저 태극 공부에 힘쓰고, 그렇지 않으면 서명의 이치를 깨달아 알아 내어 태극에이르도록 하라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오,서명은 학문의 근본이니,요컨데 어디 까지나 치우치거나 버리거나 할 수 없느니라.
---*太極圖說:송나라 周 敦이가 지은 性理學冊. 태극에서부터 음양 오행의 원리,곧 우주및 인류 만물의 나고 자라는 원리와 발전과정을 그림 풀이로 설명 하였음.
---*西銘:宋 나라 張載가 지은,어진 도리의 원리를 밝힌 글귀.서재의 서쪽창에 걸어 두었 음
---*周 敦이:北宋의 학자.(宋學_중국 宋나라때의 유학.사람과 우주와의 관계 등 만물의 이치를 밝히려는 학문.훈고학을 배척함)의 시조.그의 고향 이름데로 號를 廉溪한다
---* 張 載:북송 학자.號:子厚 지은책:東銘.西銘.正蒙.易設등

*.49살때(1558년 무 오)
겨울에 고봉 *기대승과 태극도설을 강론 하시다. 때에,고봉 기 대승이 일재 *이 항을 찿아보고 태극도설을 강론할새, 이항은 태극 음양을 하나라 하고,기 대승은 그렇지 않다하여, 종일 토론 하다가 의견이 하나로 돌아 가지 않으니, 기 대승이 와서 선생을 뵙고, 이 항과의 토론 결과를 보고 했다.선생은 기 고봉의 주장이 옳다 하시고 날이 맟도록 강론 하셨다.
---*高峯 奇大昇:조선 선조 때의 문신.성리학자.지은책:論思錄
---*이항(李恒):조선 명종때의 문신.성리학자. 號:일재(一齋).理氣 一元論을 발전시킴.

*.50살때(1559년 기미)

일재 이항에게 글을 보내어,태극 음양은 하나라함은 잘못 이라고 타이르시다.
일 재 이항이 고봉 기 대승의 의견에 반대하여,태극 음양이 하나라고 극론하는글을 선생에게 보내어,고봉 기대승에게 전해달라고 하므로 선생이 그 글을 보시고,일 재 이 항에게 간단한 편지를 보냈는데,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기군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논하고자하지 아니하나,우주를 이루는 근본의 理인 태극과,그것으로 부터 우러 나오는 음양의 氣가 섞이여,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이 그것으로 부터 나오지 아니한것이
없으며,저마다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태극이 음양에서 떠난다고 할수는 없으나,理와 氣의 분별은 한계가 없을 수 없은즉,태극과 음양은 하나라고 할 수 없는지라,周子가 "태극이 음양을 탐은 사람이 말을 탐과 같은데,결코사람을 말이라고 할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겨울에 고봉 기대승과 *"사단 칠정의학설"을 강론 하시다.
그때,기대승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있었는데, 매양 선생을 뵙고 의리에 관한 토론을 하여,퇴계 이황과 사단 칠정의 理와 氣가 서로 피어 난다고 주장하는 학설에 깊이 의심을 품고,선생께와서 질문하니,선생이 이를 아주 정밀하게 분석해서 사리를 뚫어지게 환하게 알고 그 옳고 그름을 밝히시니,기 대승이 선생에게서 배워 얻은바가 이러 하였으므로,선생이 돌아가신뒤에 그가 이황과 더불어 사단 칠정의 理와 氣가 서로 피어난다는 학설이 옳지 않음을 강론할새,선생의 의견을 많이 들어서 이를 밝히니 거의 수만 말이나 되었다.
세상에 전해 내려오는 "퇴계와 고봉의 사단 칠정에 관한 왕복문서'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나 정암의 인심 도심설을 논하시다.
정암의 성명은*나 흠순이니,그가 지은 곤지기(困知記)란 책에 '道心은 사람.만물의 본 바탕이오,人心은 사람.만물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인데,아무것도 섞이지 않는 아주 깨끗한 것을 볼 수 없으므로 희미하고,변화 무쌍한 기미를 헤아릴수 없으므로 위태롭다.' 고 하셨다.
蘇齋*노수신이 그 학설을 내세워 "생각컨데,도심은 아주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인심은 신령에 감응되어 모든 일에 통한다." 하니,선생이 매우 나무라며, "성인들이 말하는 인심, 도심은 움직이는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셨다.
선생이 돌아 가신 뒤에 퇴계와 고봉이 함께 선생의 말씀을 따라 노 수신의 주장을 공박했다.
---*四端 七情의 之說=송나라 주자학의 四端과 七情을 연구하는 학설.퇴계 이황은 理氣 二元論을 주장하고,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은 理氣 一元的 二元論을 주장하였다.
---*四端(사단):유교에서 말하는,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가지 마음씨.곧,仁:측은히 여기는 마음.義:부끄러워 하는 마음.禮:사양하는 마음.智:시비를 가리는 마음.
---*七情:사람의 일곱가지 심리 작용. 곧,기뿜,노여움,슬품,즐거움,사랑,미움,욕심.
---*羅欽順:명나라 유학자.호:整庵. 宋나라 程顥,程이,朱熹 계통의 학설을 기본으로 독자적인 一元氣說을 주장했음.
---*道心:도덕 의식에서 우러 나오는 마음.사욕에 더럽히지 않는 깨끗한 마음.
---*盧守愼:조선 선조때의 문신. 학자.號:蘇齋. 영의저을 지냄.기대승과 사단 칠정노에 관해서 의견을 교환.

*.51세때(1560년 경신)
퇴게 이황이 고향인 禮安에 陶山 書堂을 세운해다.
정월 16일 *정침에서 임종하시다.
사흘 전에 선생이 심기가 편찮으셔서 약을 드렸더니,집안 사람에게"내가 보름날에 삼가 제물을 갖추어 자식들에게 사당에 제사 지내도록 하라."하시고,보름날 선생이 병환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셔서,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당부하시되,"내가 죽은 뒤에 을사년 이후의 관작(벼슬과 작위)은 일 체 쓰지 말라" 하시고,다음날(16일)병환이 위증하여,자리를 바로 하시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선생이 아이때에 눌재 *박 상이 보고 사람들에게"예로부터 약고 재주가 많은 아이는 제 명데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일이 없는 법인데, 오직 이 아이만은 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가리라." 한 일이 있었다.과연,그 말이 그데로 실현 되었다.
이 해 3월에 장성현 대 맥동의 원당산*자좌오향 벌에 장사 지 냈다.
---*正寢:제사를 지내는 몸체의 방.또는 거처하지는 않고 일 할때에 쓰는 몸채의 방.
---*朴 祥:조선 중종때의 문신. 號:訥齋. 청백리 문장가로 이름 남.
---*子坐午向:북쪽을 등지고 정 남쪽을 향함.

------河西의 家族(정리)-----
*고조 達源(달원) 忠佐衛中領司正(충좌위중령사정)
*증조 義剛(의강) 司 署直長同正(사온서직장동정)
*할아버지 丸(환) 從仕郞(종사랑)으로 金溝 訓導였고
*아버지 齡(령) 義陵參奉 제수하였으나 벼슬하지 아니하였고
*어머니 玉川趙氏 (父 訓導 勤)
*河西-配 貞敬夫人 驪興尹氏 (父:縣監 任衡의 딸) 사이에 二男四女를 두었다.
*장남 從龍
*長男配 星山李氏 父:一齋 先生 李恒
*河西는 一齋의 모든 학문적 관심과 삶의 태도를 존경한 나머지 서로 교우하고
자기의 아들이며 一齋의 사위인 從龍을 通하여 교우를 두터이 하며서 학문적
논변:(理氣 一元論 太極說)을 論하였으며 一齋의 딸을 며느리로 맞았다.
*次男 從虎:(字:季義) 自如察訪
*次男配 南原晉氏 父:承旨壁
*장녀
*큰사위 咸安人 趙希文(조희문).號:月溪(월계)
*차녀 일찍 죽었다.
*二사위 濟州人 梁子 (양자징):號  巖(고암)--瀟灑園(소쇄원)梁山甫(양산보)의 아들
*양산보 와의 문학적 교유 소쇄원48영을 짓다.
*삼녀
*삼사위 善山人 柳景濂(유경렴): ------號 眉巖 柳希春의 아들
*玉果縣에 있을 때 眉巖 柳希春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주고 간 孝經刊誤
모사 하고 跋文을 쓰다.
*柳希春이 귀양길에 오르자 그전에 하서가 병들었을 때 돌봐준 의리를 잊지
않고 그의 아들을 사위로 맞았다.
*막내딸 結婚前 夭切
*河西의 학문적 先後배
* 하서의 學脈
*慕齋 金安國(1478--1543)
중종12년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지방에 小學과 鄕約보급에 앞장선 인물로 어린 시절 소학을 배움. 그 해에 己卯士禍로 趙 光朝 등 대부분의 私林派가
賜死 내지는 流配되었고 慕齋 도 禍를 면하기는 하였으나 利川으로 歸鄕.
*新齋 崔山斗(1483--?)
慕齋가 歸鄕後 홀로 四書五經을 공부하였으나 당시 己卯士禍로 인해 同福에서 유배 생활하던 新齋 崔山斗에게 사사,
*訥齋 朴祥(1474--1530)
이웃 광주에 돌아와 있던 訥齋 朴祥에게 찿아가 뵈옵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 仰亭 宋純(1493-1583)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仰亭 宋純의 門下에도 출입하였다.
*河西의 交友(성균관)
22세때 성균관 司馬試에 합격 進士가 되었는데 徐敬德,成運,白仁傑,鄭惟吉등이 同榜이었다.
이때 退溪 李滉등 깊은 친교를 맺고 학문을 연마 하였는 데 두분 사이의 돈독한 우의는 退溪가 돌아갈때에 贈別詩를 써서 "夫子는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李 白. 杜 甫요. 글씨는 王羲之.趙孟兆로구료"라고 한것이나,후일 퇴계가 후일 "함께 교우한 사람은 오직 河西 한사람 뿐이었다"--퇴계전서 언행록 권 一.
*別試 文科 丙科에 급제하여 賜暇讀書의 恩典으로 湖堂에 오랐다.
이때 함께 공부한 13인의 湖堂 修계록을 보면 평생 교우한 퇴계 이황,(1501--1570),임형수(금호1504--1547),유아길(임당1515--1588),등 거의가 희대의명사들로서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했다.

* 하서는 一齋와 학문적 탐구
梁山甫와의 문학적 교우
 仰(면앙 宋純)과의 학문적 師承으로 삼고
鄭撤(정철)을 文人으로 두었으며
이때 交遊한 문인들로서는 林億齡,梁山甫,高敬命,鄭澈,金成遠,奇大昇,梁應鼎등
많은 名士들이 河西와 함께 師弟로서 友人으로서 從遊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