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유학자 하서 김인후  영세 흥왕의 터를 잡은 하소부인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1 단종에 충효를 다하신 손암 김신덕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2 남문창의 맹주로 활약한 오천 김경수
동방의 유학자 김인후 약전3 임진란에 종군하신 취옹 김남중
단종에 충절한 복양제 김수노 삼양사 창립등 대사업가 수당 김연수
명.황제를 감동시킨 백암 김대명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 가인 김병노
진주성에서 순절한 판관 김천록 한국 지성의 거목 남제 김상협
현대사의 거인 인촌 김성수 추효업적을 이룩한 맥촌 김형지
세계의 언론인 일민 김상만 학문, 덕행, 효를 다하신 선조들
과거에 급제하신 선조 사환들 호남 여인열전 여흥민씨부인
난중에 정절을 지킨 열녀 할머니들  갤러리 게시판
너는 커서 河西가 되라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3部

東邦의 大儒學者 河西 金麟厚 略傳 3部
-----------------------------------가신 뒤------
*.선생 가신 지 4년(1564년 갑자)
영귀정 짓다.선생이 돌아가신 다음해인 신유년에 선생의 제자 양 자징(梁子징)이 家壯을 짓더니,갑자년에는 옥과 선비들이 선생의 남기신 사랑을 잊지 못하여'영귀정(詠歸亭)'이라는 *사당을 지었다.
영귀정에는 선생과 임진란 때의 의병장이며 이조 참의(지금의 내무부 관리관)벼슬을 받은 유 팽로 사간(司諫:사간원의 종 3품 벼슬) 李興淳,辛 二剛들의 신주를 모신다.
---*家狀:집안의 조상의 (行狀:사람이 죽은 뒤에 평생 지낸 일을 적은 글)
---*祠堂:神主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집.

*.가신 지11년(1570년 경오)선조 3년
2월에 기 대승이 나주로 돌아가고, 12월에는 퇴계 이 황이 세상을 떠났다.
순창 선비들이 '화산사華山祠'라는 사당을 짓다.'화산'은 선생이 머므르시던곳이다.
화산사에는 선생과 *大司諫 신 미주(신숙주),충암*김정,제봉 *고경명,건재*김 천일 들의 신주를 모신다.그리고 후에 어암사(어암사)를 지었다.
---*大司諫=司諫院: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의 으뜸 정3품벼슬.
---*金 淨:조선 중종때의 정치가.문장가. 號;沖庵.
---*高敬命: 임진왜란때 의병장 號:齊峯.
---*金千鎰:임진왜란때 의병장.號:健齋. 임진 3장의 한사람.

*가신 지 31년(1590년 경인)
4월에 노 수신이 죽고, 11월에 통신사 黃 允吉등이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만난 해다.
제자 卞 成溫 들이 장성군 서쪽 십리 밖 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다.
---*書院: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고 뛰어난 학자나 충신을 제사 지내는곳.

*.가신 지 98년(1658년 무술) 효종 9년
전라도 *유생들이 임금께 글을 올려 장성 서원에 이름을 지어 주시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儒生: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배워 받드는 선비.

*.가신 지102년(1662년 임인) 현종 3년
나중(1675년)에선생의 묘표(墓表:무덤앞에 세우는 푯돌)를 지을 *김 수항이 4월에 대제학이 되었다. 임금이 서원 이름을 '필암 서원(筆岩 書院)'이라 하시고,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 주셨다.
---*金 壽恒:조선 현종때의 相臣.號:文谷.영의정을 지냄.

*가신 지 108년 (1668년 무신) 현종 9년
경연에 관계하는 *이 단하가 임금께 글을 올려 선생께 벼슬을 내려 주시라고 청하여, 봄에
'*자헌 대부*이조판서겸,*지경연사,*지의금부사,*지춘추관지사,*지성균관관사,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 *오위 도총부*도총관, *세자 좌빈객'이라는 벼슬을 받으셨다.
---*李 端夏:조선 중기의 문관.호:畏齋.이조참의,좌의정을 지냄.
---*資憲大夫:조선시대 정2품 문무관의 벼슬등급.
---*吏曺判書:지금의 내무부 장관.
---*知經筵事:임금앞에서 經籍의 강론을 하는일을 맡은 관청인 經筵廳의 우두머리.정 2품벼슬.
---*知義禁府事: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죄인을 다스리는 관청인 義禁府의 우두머리.정2품.
---*知春秋館事: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관한 기록을 맡은 관청인 춘추관의 우두머리.정2품.
---*知成均館事:성균관의 우두머리.정2품.
---*五衛:조선시대 군대 편제.중위,좌위,우위,전위,후위의 다섯衛.
---*五衛 都摠府:조선시대 5위를 통솔 통솔 지휘 감독하던 관청.
---*都摠菅:조선시대 오위도총부의 軍務를 총괄하는 최고 장관.정2품.
---*世子左賓客=조선시대 世子 侍講院:왕세자에게 경서와 사기를 강론하고 도의를 지키도록 훈도하는 일을 맡은 관청.정2품벼슬.

*.가신 지 109년(1669년 기유)
한가을 8월에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시다.
문정의 문(文)은 도덕가로서 학문이 넓고 깊음이오,정(靖)은 사람이 그의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남이다.
---*諡號:재상이나 어진 선비들이 죽은 뒤에,그들을 기리어,임금이 내려주는 이름.

*.가신 지 112년(1672년 임자)
현석 *박 세채가 행장을 지었다.
---*朴 世采:숙종때의 상신. 성리학자. 호:玄石.

*.가신 지 115년(1675년 을 묘) 숙종 1년.
정월에 송 시열을 함경도 덕원에 귀양보내고, 7월에 김 수항도 원주에 연금한일이 있다.
문곡 김 수항이 모함에 빠져 원주로 갔다가 진도로 귀양 가기 전인 이 해에 선생의 묘표를 지었다.

*가신 지122년(1682년 임술)
우암 *송시열이 *신도비에 새길 글을 지었다.이 신도비에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하서 김 선생이 나시다."라는 대목이 있다.
---*宋 時烈: 조선 중기의 정치가.학자. 호:尤庵.
---*神道碑:옛날 종 2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근처에 있는 큰 길 가에 세우던 비석.

*.가신 지 132년(1694년 갑술) 숙종 20년
한가을 팔월에 전라도 진사 曺 命根들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 순창'화산서원(華山書院)"의 이름을 지어 받다.


*.가신 지 194년 (1756년 병자) 영조 32년
여름 4월에 옥과 현감 송 명흠(宋 明欽)이 임금에게 글을 올려,'詠歸 書院(영귀서원)'의 이름을 지어 받다.

-----------------------문묘에 모시다---------------
*.가신 지211년(1771년 신묘)영조 47년
*문묘*배향을 임금께 청하다.
전라도 선비 양 학연(梁 學淵)들이 공자를 모시는 사당에 선생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임금에게 글을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文廟: 공자 와 성현 및 제자 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 서울 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 있음.
---*配享:신주를 모심.

*.가신 지 217년 (1777년 정유) 정조 첫 해
본암 *김 종후가 *묘지를 지었다.
---*金 鐘厚:조선시대 정조 때의 掌令(장령=사헌부의 정 4품벼슬).호:本庵.
---*墓誌:죽은사람의 이름,벼슬,행적,자손이름,생일,죽은날,장례연월일 들을 새겨서 棺과 함께 묻는 돌에 새기는 글.

*가신 지226년 (1786년 병오) 정조 10년
늣봄 3월에 임금이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다.
임금이 *서삼릉의*희릉과*효릉을 참배하시고,하교 하시기를"세상을 떠난 선비 김 인후는 천고에 빛나는 위인이니,이능을 참배한 후에 어찌 아무런 표시가 없을수 있느냐." 하시고,관계부처로 하여금 좋은 날을 가려 제사 지내게 하셨다. 그 제문은 전집에 실려 있다.
정조가 인종릉과 인종의 어머니의 릉을 참배 하고서 인종과 선생과의 특별한 우정을 생각하여 선생의 제사를 지내게 한 것이다.
한가을 8월에 팔도의 선비 박 영원(朴 盈源)들이 공자의 사당에 선생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임금께 글을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상소에"인후는 당대 유학의 권위자로, 학문과 덕망을 겸비하여 모범이 될만한 사람으로서,기묘사화에 관해서 모두들 쉬쉬하며,아무도 감히 말을 못하는때에, 오직 인후가 혼자 임금께 글을 올려,그 시비를 밝히고 반성 하라고 충고하여 중종으로 하여금 뉘우치게 하다."라는 대목이 있다.이상소는 전집에 실려 있다.
이상소를 보신 임금(정조대왕)은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리셨다.
"문정(文靖:선생의 시호)의 깊은 학문은 짐(나)이 높잉어 사모하나,문묘에 배향 하는일은 예법에 관한 일이니,수백년이 지나도록 겨를을 내지 못한 일을 지금 당장 어떻게 가벼이 논할 수 있느냐.너희는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이어서, 겨울 10월에 팔도 유생 정 헌(鄭 櫶)들이 같은 뜻으로 상소 하였으나,결과는 마찮 가지였다.
---*西三陵:경기도 고양시 원당에 있는 세능.희릉,효릉.예릉.
---*禧陵:중종의 둘째부인 장경 왕후(인종의 어머니)의 능.
---*孝陵:인종 과 인종비 인성 왕후의 능
---*睿陵:철종 과 철종비 철인 왕후의 능
---*上疏:임금에게 글을 올림.
---*批答: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

*.가신 지 229년(1789년 기유)
여름 4월에 심 익현(沈 翼賢),
가을 8월에 신 광례(申 光禮)들 전국 선비들이 문묘 배향을 청하는 상소를 했다.

*가신 지 230년 (1790년 경술)
봄 3월에 이 악겸(李 岳謙)들 전국 선비들이 역시 문묘 배향을 청원 했다.

*가신 지 236년 (1796년 병진)
신묘년(1771년) 양 학연들의 상소 이후로 공론이 분분하던 중에 또 팔도의 서울과 지방 선비들이 잇달아 상소하여,배향을 청하는일이 6,7회에 달하되 허락을 받지 못하더니,
이해 여름 6월에 이 명채(李 明彩)등 팔도 선비들이 선생과 문열공 *조헌 과*문경공 *김집의 문묘 배향을 청하는 글을 올리니,임금의 대답 중에 "문정 김 인후는 의리의 근본을 환히 꿰뚤어보고,道學,節義,文章이 뛰어 나다는것은짐(나)도 잘 아는 바다."라는 대목이 있다.
이어서, 속세를 떠난 고결한 선비 김 무순(金 懋淳)들이 공자 사당에 배향해 줄것을 청하는 글을 임금께 올렸으나,허락을 받지를 못하였다.

가을 7월에, 경기,호남3도 유생 이 종호(李 種祜)들에 이어,팔도 선비 채 홍신(蔡 弘臣)들이 선생과 조문열,김 문경ㅇ르 공자 사당에 배향해 달라고 임금께 청하는 글을 올렸다.그랬더니, 임금이 내린 대답 중에 "문정,문열의배향을 요청하나, 우리 왕조에 들어서 성리학을 밝혀 근본을 처음으로 꿰뚤어 공자와 주자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문정 한 사람 뿐이니 모두 문정에 양보하여,배향을 바랄진데는 문정을 단독으로 천거함이 마땅 하리라."하는 귀절이 있다.

9월에 심 내영(沈 來永)등 전국 대학생(성균관과 사학 학생)들이 선생을 공자 사당에 배향해 달라고 청하는 글을 임금께 올렸다. 그대답에 "너희가 올린 글이 간략 하며서도 극진 하여 짐의 마음을 사로 잡으니 감탄할만 하다.그러나 막중한 예를 가벼이 허락 하기 어렵다." 하는 대목이 있다.
이어서,이 광헌(李 光憲)등 학생들이 또 같은 내용의 글을 올렸다. 그 대답에 "신중히 하련다는 뜻은 앞서 밝혔노라." 고 하신 대목이 있다.

문묘 배향의 허락을 받다.
이해들어,이명채,김 무순,채 홍신,이 규남 등 전국 선비들과, 이 달 들어 심 내영,이 광헌 등 전국 대학생들의 문묘 배향 요청에 잇달아서,홍 준원(홍 준원)등 대학생들이 선생을 공자사당에 모시게 해 달라고 청하니,임금께서 "문정은 우리 나라 온 것은 그 뜻이 예의를 중히 하고 일을 신중히 하려고 한 때문인데,글을 세번이나 올리니 다시 더 미룰 수 없다.너희의 소청을 허락하니,禮官을 시켜 전례을 잘 알아서 실수함이 없이,좋은날을 가리어 공자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절차를 거행 하도록 하라." 하시고, 선생에게 *대광보국 숭록 대부,,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사,*영홍문관사,*영예문관사,*영춘추관사,*영관상감사." 라는 신하로서는 더할수 없는 최고의 벼슬을 내리고,
겨울 10월에 시호를 "文正"이라 고쳐 지어 주셨다.
文은 도덕가로서 학문이 넓고 끔이오,正은 바른 도리로서 사람을 교화하여 따르게 한다는 뜻이다.
11월에 임금이 관계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드디어,선생이 돌아 가신 지 236년 만에 오랜 세월 동안 전국 각지의 선비와 학생들의 노력으로 선생의 신주를 공자 사당에 모셨다.
---*趙憲:임진란때의 의병장. 호:重峯 諡號:文烈.
---*金 集;조선 효종때의 禮學者. 시호:文敬.
---*大匡 輔國 崇祿 大夫:조선시대 정1품의 품계(지금의 총리급)
---*領議政:의정부의 으뜸 벼슬.내각을 총 총할함.지금의 국무총리.
---*領經筵事:경연청의 으뜸벼슬.정1품 (총리급)
---*領弘文館事:홍문관의 으뜸벼슬.정1품(초리급)
---*領禮文館事:예문관의 으뜸벼슬.정1품(총리급)
---*領春秋館事:춘추관의 으뜸벼슬.정1품(초리급)
---*領觀象監事:관상감의 으뜸벼슬.정1품(총리급)
전국 선비들이 선생을 문묘에 배향해 달라는 글을 임금에게 올리기 시작하여,1771년(선생 가신지 211년)부터 6번,1796년(선생가신지236년)에 4번이나 올렸고,그리고 전국 대학생들이 그 해 9월에 3번 글을 올려서 허락을 받았으니,실로 25년의 세월 동안 전국 선비,학생 들이 노력했고,결국 마지막 성사는 대학생들이 몰아 붙여서 해 냈다고 하겠다.


*도학(道學)즉 性리學 主宗인 朱子의 학설을 깊이 탐색하고 나름데로의 성리학설을 구축하여 당대 성리학계제1인자로 추앙되고 존대 받으셨습니다.
*1590년 호남 유림이 장성 기산에 할아버님을 주벽으로 모시는 서원을 세웠는데 왜란때 소실되고 복원하였다가 그후 황룡면 필암리로 옮겨 顯宗이 筆巖書院이라 賜額하여 지금에 이름니다.
*호남에서는 유일하게 성균관 文廟(공자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 배향되었고 의정부,영의정,을 비롯한 많은 최고 관직이 追贈되었으며 文靖에서 文正으로 改諡 되셨습니다.
*1992.11.30광주 어린이 대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전국 각지에서 4000여 저명인사 및 종친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서 길이길이 우리 가문 뿐만 아니라 전국민의 귀감으로서 추앙받고 교육적 역활을 다 할것입니다.